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민지 근대화론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나까무라 사또루의 중진 자본주의론에 영향을 받아 80년대 후반부터 김낙년, 호리 가즈오堀和生 등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산업화에 대한 이론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한국에 본격적인 사유재산권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것은 1912년에 도입한 "민사령"이었다. * [[경술국치]] 전까지 농민들의 토지소유권은 문기라는 민간토지문서를 통해 확인되던 상황이었으나[* <근대 공문서의 탄생>], 국가에서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국/민유지 분쟁과 토지소유권조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실시하여, 기존의 가문이나 왕실, 관청등의 소유권이 얽혔던 복잡한 토지소유권을 등기제도의 도입 등을 통해 일물일권(一物一權)적인 토지소유권으로 정리하였고 국유지와 사유지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특히 왕실의 재산은 국유지로 환수된 후 다시 농민들에게 불하되어 민중에 의한 토지의 매매와 자본 전환이 수월해졌다.(예를 들어 땅을 담보로 대출) 또한 가문이나 문중 등이 법인으로 인정되지 않아 가문의 토지들이 개인명의에 따라 분할되어 전통적 신분인 양반가문의 재산기반이 붕괴하는 데에 한몫했다. * 동시에 [[토지조사사업]]으로 징세기구와 제도가 정비되고, 일제의 화폐정리사업으로 구화폐가 정리되고 화폐경제가 정착함에 따라 전체적으로 정부의 조세수취가 개선되고 세금도 금납화되었다. * 일본계 은행들이 공식적으로 영업하여 조선에 은행과 금융제도가 정착하게되었다. * 산림보호령을 제정하여 산림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와 육성,관리가 시작되었으며 산사태나 토사로 인한 자연재해가 감소하였다. * 토지소유권과 금융업이 성립되자 지주는 [[소작]]제도를 한층 더 활용하여 경제적 수익의 증대를 도모하였고, [[산미증식계획]] 시기와 맞물려 집중적으로 곡물생산량을 증가시켜 일본으로 쌀을 이출하여 소득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 1920~30년대에 이렇게 수입이 증가한 지주는 자신의 늘어난 소득을 재화와 사치품등을 구매하거나 금융과 주식투자에 활용하였다. * 지주들의 쌀이출과, 일본산 공산품의 이입 확대로 금융업과 시장거래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 지주의 상품구매에 조선에는 공산품시장이 형성되었고, 늘어나는 수요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 조선에서도 공산품을 생산하기 위한 경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창업과 운영이 활발해진다.[* 경성방직과 평양공업단지. 경성방직의 연구는 에커트와 주익종의 연구가 대표적이고 평양공업단지는 주익종의 것이 있다.] 지주는 농업 부문의 재투자와 더불어 조선공산품 구입이나 조선 내 지주회사, 주식회사에 대한 주식투자도 병행하면서 조선에 있는 회사들도 더욱 성장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 농업과 가내수공업이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공업 생산량은 30배 이상 증가하였고, 그중 공장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일본상품에 대한 이입의존도가 점점 감소하여 일본산 상품에 대한 이입대체화가 진전되었고, 고무신과 메리야스 등 경공업부문에서는 오히려 일본을 능가하여 일본 본토로 이출[* '수출'과는 다르다.]까지 하였다. * 이에 [[조선총독부]]는 농업중시정책을 농,공업병진 정책으로 전환하고 일본자본을 끌어들여 중공업단지 조성을 장려하였다. * 농업용화학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조선북부지역에는 중공업단지가 형성되고, 화학비료생산과 겸해서 전기등을 자급하게 된다. * 한편, 산업화의 진전으로 근대적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어갔다. * 기본적인 한계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일제강점기 경제는 성장추세였다. 실질임금과 소득, 소비, 식생활[* 주익종, 「식민시기의 생활수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 2006], 평균신장[[http://blog.naver.com/taltlis/220498674425|#]][* 그러나 반대로 평균 신장이 줄어들었다는 연구결과도 없지 않다.[[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61205/81664223/1|#]]], 평균수명과 인구등이 증가하여 전체적으로 식민지 시기 경제는 성장하였다. * 다만, 산업통계에서 전체 공업 생산액과 생산비중에서 전통적인 가내수공업의 비중이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공업생산액의 절대값도 일제 패망 당시 이 값은 일본 공업 총 생산액의 4% 정도였다. * ‘1910년∼1940년동안 한국의 인구는 연 1.33%씩 증가했으며 이 기간 중 1인당생산은 2.37%씩 증가했다. 물론 이보다 높거나 낮은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것을 감안해야하지만 식민지시기 일방적으로 수탈한 제로섬게임의 시대였다는 것은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https://blog.naver.com/hong8706/40196004699|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1인당 GDP의 변화추세는 아래 그래프와 같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6174/4|출처]] [[파일:200702120500030_7.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